1980년대 초까지 소련 교역은 사실상 전무
19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상황 변화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선언 후 한·소 교역 시작

1990년 1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왼쪽)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한·소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1990년 1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왼쪽)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한·소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1978년 5월, 재미 교포가 운영하는 중개업체 인트락(Intrac)사 통해 소련산 원목 및 동태 수입 추진, 실패. 1978년 6월, 핀란드의 소·동구 전문 중개업체 카우코마르키나트사에 커미션 조건으로 소련산 펄프 확보요청, 실패. 1980년 초, 일본의 소련전문 무역업체 초리사 통해 소련에 코트 137만 달러어치 수출 추진, 성공. 1981년, 일본의 타이오사 통해 소련에 남성용재킷 수출추진, 성공.”

1980년을 전후한 삼성물산의 초기 대 소련 교역일지의 전부다. 삼성물산은 이와 함께 대소련 수출·입 규모를 1977년 각각 40만 달러 및 50만 달러, 1978년 100만 달러 및 530만 달러, 1979년 100만달러 및 630만달러로 기록해 놓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합무역상사 치고는 대소 교역 규모가 너무 초라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삼성물산의 경우 이 같은 교역 일지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종합상사는 1970년대 대소교역에 관한 기록조차 없는 실정이다. 18년 장기집권의 브레즈네프 통치시대는 물론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기 전인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시대에도 우리 기업들은 핀란드나 일본, 그리고 일부 미국의 중개상을 통해 소련과의 간접교역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급변한다.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급물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지난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임명돼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면서 강조한 슬로건이다.

고르바초프는 이같이 신사고를 주창하고 나섰고 1986년 7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을 통해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들과의 공존 및 관계개선을 강조했다. 그는 특히 1988년 9월 크라스노야르스크선언에서 “한국과의 경제협력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을 구체적으로 거명하기에 이른다.

고르바초프의 이 같은 신사고는 물론 전 인류의 역사를 뒤바꿔 놓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지만 특히 냉전체제의 가장 큰 희생양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한반도에 미치는 파장은 막대했다.

◆6공화국, 북방정책으로 발 빠른 대응

노태우 대통령의 6공 정부도 1988년 7·7선언을 통해 북방정책을 공식 발표하는 등 세계질서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7·7선언에 이어 열린 서울올림픽에 대비해 소련은 그해 8월 15일 주한 임시영사사무소를 개설했다. 이후 1990년 2월 22일 모스크바에 한국영사처가 공식 개설될 때까지 현대건설과 소련 당국간 시베리아개발 합작사 설립을 위한 의향서 교환(1989년 1월), 코트라(KOTRA)와 소연방 상의간의 무역사무소 교환개설(1989년 4월), 소련 과학원 산하 연구소의 김영삼 당시 민주당총재 초청(1989년 6월) 등 굵직한 진전이 이어졌다. 양국은 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 이어 같은 해 9월 30일 국교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배경에 힘입어 한·소 양국간 경제교류도 급진전됐다. 특히 무역업계는 거대한 소련시장이 서울올림픽 이후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던 우리의 수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술렁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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