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잘한 점과 못한 점 후대들에게 제대로 교육해줄 필요가 있다. 우리도 외국 기업들에게 솔직히 이야기 하고 있다. 과거에 정경유착이 있었다고. 금리가 8~10% 넘는 돈을 정부가 외국에 빌려와서 기업들에게 2~3%로 나눠줬다. 이게 정경유착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정부 공무원이 유능하고 똑똑했고, 기업들은 기업가 정신이 있었다. 어쨌건 잘못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성장한 것은 맞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원, 기술력 등이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외국 언론들에게 이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는다. 최고 경영진들이 그러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들도 잘못은 맞지만 당시의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해준다.”

한 대기업 전직 고위 임원의 말이다.

운 좋게도 기자는 기업, 재계를 오랜 기간 취재했고, 덕분에 장기간에 걸쳐 기업사(史)를 공부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얻었다. 초기에는 현재를 취재했다가, 점점 과거를 들여다봤다.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사료를 찾아 읽어보고 관계자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이해를 했다.

공부를 해 보니, 많은 이들이 주장하는 우리 기업들의 흑역사는 대부분 ‘사실’이 틀리지는 않다. 다만, 그 기업이 당시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 봤는지 않았는지에 따라 해석은 다르다. 기업은 수많은 대내외 변수들을 접하고, 그 변수들 가운데 그 시기의 상황에서 기업에게 가장 옳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한다. 시기라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기업의 선택은 훌륭한 것일 수도, 불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즉, 21세기의 기준으로 20세기 초반의 일제 치하, 6·25 전란기, 건국 초기의 혼란상, 수출 드라이브 시기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과거는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궤변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 우려가 지금 ‘삼성’과 ‘이재용’으로 대표되는 반재벌, 반기업 정서로 이어지고 있다. 반재벌 정서는 ‘노사 관계의 주범’로부터 시작해 ‘사회 양극화의 주범’, ‘분배 약화의 주범’에 이어 ‘청년실업 문제의 주범’이라는 식으로 진화했다. 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재벌을 악인으로 몰아넣는다.

왜 자꾸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키우려는 것일까? 청년실업 문제를 놓고 보자.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실업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다.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와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상실감이 큰 젊은이들을 책임져야 할 1차적인 대상은 정부다. 그런데 정부가 아무리 정책을 내놓아도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희망고문만 커져 간다. 정부는 그 책임을 지기 싫다. 관련법과 제도를 입안하는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뭔가를 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효과가 없다. 그런데 책임은 지기 싫다.

책임의 화살은 기업으로 향한다. 대기업이 정부의 이권을 받아 청년들이 가져야 할 몫을 빼앗아 간다고 선동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부를 총수들의 안위에만 쓴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상처 받은 젊은이들과 핍박한 삶에 힘겨워 하는 중장년층들도 처음에는 아니라고 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야기를 믿게 되고, 그들마저 재벌은 계속 나쁘다고 한다. 정부 잘못이 아니라 재벌 잘못이라고 책임을 떠넘긴다. 정치권과 정부는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재벌 응징에 더 한층 몰두한다. 각본처럼 짜인 이러한 프레임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삼성 합병·승계 의혹’에 대한 검찰의 기소 여부가 이번 주에 결정 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9일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 됐고, 이어 26일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 중단과 불기소 권고를 내렸다. 그것도 현안위원 10대 3이라는 압도적인 표결 차이로 말이다.

수사심의위 권고 후 여권 일각과 진보 시민·사회단체들이 검찰에 이 부회장 기소를 압박하고 있고, 이에 맞서 재계와 학계는 수사심의위 제도의 취지를 살려 검찰이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검찰 수사팀은 이 부회장 기소 강행으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는 게 상황을 지켜봐 온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수사심의위 제도는 ‘검찰 수사의 절차와 결과에 대한 국민 신뢰를 제고한다’는 취지를 내걸고 검찰이 자체 개혁 방안 가운데 하나로 2018년 도입했다. 강제 효력은 없지만 검찰은 제도의 취지를 살려 그동안 8번의 수사심의위의 권고를 모두 따랐다. 이러한 전례를 깨서라도 검찰은 이 부회장과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다.

과연, ‘이재용’이라는 개인 한 명을 반드시 재판장에 세우고, 구치소에 보내야만 한국의 경제정의가 구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기소를 주장하는 측은 삼성전자가 2020년 2분기에 어닝 서프라이즈의 실적을 기록했다는 소식에, 그동안 삼성의 기업 활동 위축은 변명에 불과했다고 비난한다. 실적은 과거 노력의 결과물이다. 많은 이들이 삼성의 불투명한 미래를 우려하는데, 그들은 삼성의 과거의 결과만 보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업들이 안개 속 같은 불확실성 속에서 생존 방안을 찾는데 혈안이 됐지만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했다. 리더의 역할은 이런 시기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리더는 경영자와 임직원들의 역량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삼성에서는 이 부회장이 리더다.

이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불법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단언해 왔고, 수사심의위로부터 인정받았다. 더 나아가 이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잘못된 과거가 반복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제 시작이다. 삼성은 관행을 타파하고 새 시대에 맞는 도덕성을 갖추기 위해 방금 출발했다.

이러한 점을 검찰에서도 반영해야 한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반기업 정서 프레임을 이용해 총수에게 죄를 씌우려는 무리수를 두어서는 안 된다.

“기업들이 세계에서 뛰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기업들도 정부에게 바라는 건 하나도 없다. 그냥 가만 놔뒀으면 좋겠다. 그런데 왜 정부에 굽신거리냐? 비난받기 싫어서다. 해코지 당하기 싫어서. 정부가 기업 괴롭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해코지 당하지 않기 위해 정부의 눈치를 본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굽실거리게 되는 구조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국가를 위해 뛰는 기업이 정부의 해코지 때문에 국가에 등을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산업부장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와이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